충선왕은 할 말을 잊고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충선왕은 개혁 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우탁을 징치(懲治)하지는 않았다.
《고려사》 열전에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탁은 경사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 : 거북이 껍질, 짐승의 뼈, 대나무 등을 써서 길흉을 판단하는 점법)가 맞지 않음이 없다.
지부상소란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지부상소를 한 우탁은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안동 예안(禮安)에 낙향하여 원나라에서 유입된 정주학 《역경(易經)》의 정전(程傳)을 연구해 학자로서 후학들의 존경을 받는다. 충선왕은 우탁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다시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그는 학문에만 전념했다.
유학의 거두, 강직한 충의지사의 표상인 우탁은 기울어가는 고려의 운명과 막을 수 없는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는 두 편의 탄로가(歎老歌)를 읊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로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하고 있다.

한 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잠깐 불고 간데없다.
잠깐 동안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해서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선비의 추상같은 기개를 가르쳐준 우탁

이제현은 순탄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고려의 과거 급제자들은 상당수 지방 수령 아래의 속관(屬官)에 임명된 다음에 중앙 관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제현은 과거에 장원을 한 실력과 아버지 이진과 스승 권부의 후광으로 외직(外職)을 거치지 않고 17세 되던 해(1303년)에 임금과 왕비의 제사에 쓸 쌀을 저축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아인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연경궁녹사(延慶宮綠事) 등을 거쳐 우탁이 지부상소를 올린 해인 22살 때(1308년)는 왕명의 작성과 시정(時政)의 기록을 관장하는 예문관(藝文館) 및 역사의 편찬을 관장하는 춘추관(春秋館)에 선발되어 재직하고 있었다.
약관(弱冠) 이제현은 조정에서 그와 글을 논하기를 꺼릴 정도로 필명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이제현에게 우탁의 목숨을 건 지부상소는 놀라움을 넘어 충격과 경악으로 다가왔다.
‘목숨이 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기개가 높은 선비라 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릴 수 있을까?’
이제현은 역지사지(易地思之) 해봤다. 신진 관료의 맹아(萌芽)를 자부해 온 자신이지만,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충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옛날 통일신라시대 설총(薛聰, 원효대사의 아들)이 신문왕(神文王)에 올린 <화왕계(花王戒)>를 통해 백두옹(할미꽃, 충신에 비유)이 화왕(모란, 왕에 비유)에게 아첨하는 장미(간신을 비유)를 경계하라고 간했으나 듣지 않자, 요염한 꽃을 가까이 하면 충직을 소원(疎遠)하게 여긴다며 떠나려 하자 신문왕이 크게 깨닫고 사과한 고사는 알고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상소는 일찍이 없었는데…….’
이제현은 집무실 안을 맴돌며 목숨을 담보로 한 지부상소를 생각해 봤지만 속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급기야 그는 ‘풀리지 않은 의문’을 안고 스승이자 장인인 찬성사 권부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권부는 막 퇴청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인 어르신, 저 왔습니다.”
“익재, 자네가 웬일인가?”
“장인 어르신, 역동(易東, 우탁의 호) 선생이 목숨을 걸고 지부상소를 올렸사옵니다. 도대체 역동 선생은 어떤 분이시기에 그토록 기개가 높사옵니까?”
권부는 우탁에 대한 이제현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역동은 나와 함께 안향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결발동문(結髮同門)이네. 그는 자네와 비슷한 나이인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했는데, 영해지방의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섬기는 등 폐해가 심하자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 신사(神祠)를 철폐한 후 백성을 교화하여 폐해를 근절하였다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역동은 문신이지만 무신 못지않은 기백과 아부곡세(阿附曲世)를 모르는 선비의 표상이네.”
“우탁 어르신의 호에 역(易)자가 들어간 연유는 무엇이옵니까?”
“원나라 황제는 우탁의 높은 학문과 넓은 식견에 감복하여 ‘주자(朱子)가 동방에 다시 태어났다’고 칭송했다네. 또 정관이란 학자는 우탁이 주역에 박통함을 알고, ‘중국의 주역이 동쪽으로 갔다(吾易東夷 오역동이)’며 극찬했다네. 이후 세상 사람들은 우탁을 역동선생이라 불렀다네.”
“작고하신 회헌(晦軒, 안향의 호) 선생님께서도 생전에 역동 선생을 높이 평가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네. 회헌 선생님께서는 임종하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을 불러 ‘그대들은 우탁보다 연상이나 동년배라 하여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우탁을 나를 대하듯이 스승으로 섬겨라’ 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네.”
“장인 어르신, 과연 역동 선생님께서 무사하실 수 있겠사옵니까?”
권부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선왕의 후궁을 취한 충선왕의 행위는 우리나라 왕실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며, 고려의 풍속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네. 때문에 오늘 금상이 패륜을 저지른 과오로 인해 역동의 충간에 곤욕을 치렀지만, 금상은 개혁 군주이고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있으니 역동의 신상에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일세. 자네는 너무 괘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이제현은 장인 권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먹구름이 잔뜩 낀 가슴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듯하여 답답했던 마음이 어느덧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퇴청 길에 장인이 말한 ‘역동은 문신이지만 무신 못지않은 기백과 아부곡세(阿附曲世)를 모르는 선비의 표상이네’ 라는 말을 골똘히 반추하며 걸었다.
장인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이제현은 마치 그 옛날 김유신 장군이 말 등에 앉아서 조는 틈에 애마가 전날에 드나들었던 기생 천관녀의 집에 도착했다는 전설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탁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탁의 집은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나와 동쪽으로 관청거리(官途)를 지나서 5리쯤 가면 있었다.
우탁의 집에 당도한 이제현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방문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 기별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럽사옵니다.”
낙향을 위한 행장을 꾸리고 있던 우탁은 댓돌을 내려서며 이제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익재 공이 어인 일인가. 낙향거사의 집에 어려운 걸음을 했네. 어서 안으로 들게.”
이제현은 조정의 중진으로 중책을 역임하고 있는 우탁의 살림살이가 너무나 초라해서 놀랐고, 약관 22세의 선비를 따뜻하게 맞이해 준 우탁의 사려 깊은 배려가 너무 극진해서 두 번 놀랐다.
우탁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돌았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46세 선비의 모습은 태산교악(泰山喬嶽)처럼 당당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서재로 들어온 두 사람은 맞절로 예를 갖추고 좌정했다. 청렴한 선비집이라 박주산채(薄酒山菜)의 소박하고 정갈한 주안상이 나왔다.
“한잔 들면서 이야기 하세.”
“예, 그러하지요.”
우탁은 이제현에게 술을 권하며 조금은 서먹한 분위기를 해소했다.
“내 보학(譜學)에 대해 크게 공부한 바는 없지만, 자네 집안의 내력과 자네의 출생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지. 자네 증조부 이득견(李得堅) 어른이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사족(士族)으로 발돋움한 후 조부인 이핵(李) 어른을 거쳐 자네 춘부장 대에 와서 삼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니 과시 신흥 명문 집안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