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조정은 이제현을 성균악정(成均樂正, 성균관에 두었던 음악 관계의 일을 보는 종4품)으로 불러들였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방관직을 수행하며 어려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핀 선정(善政)이 조정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까닭은 그가 우탁의 지부상소에 영향을 받아 참 선비의 도리를 실행하려는 ‘지부복궐(持斧伏闕)’의 풍도와 만고의 청백한 선비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서해도 고을 백성들은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제현의 목민관으로서의 덕행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에 새겨 칭송하였다.
1313년(충선왕5) 가을. 이제현은 27세에 정4품 내부부령(內部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 술·장·꿀 같은 직조를 맡은 곳)을 제수받아 치수(銖, 가벼운 무게)와 척촌(尺寸, 자와 치)을 교정하였다. 이제현은 이것을 행하면서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로지 백성의 편에 서서 민생과 직결되는 재화의 출납 및 관리와 어려운 도량형 문제를 한 올 한 올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하였다.
“이제현은 재예(才藝)가 능해 기국(器局, 도량과 재간)을 한정할 수 없는 군자라 이를 만하다.”
젊은 나이에 이러한 찬사를 듣는 것은 보통 벼슬아치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창조적 리더십을 갖춘 이제현의 관직 생활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이진으로부터 배운 원만한 처세와 스승 백이정·권부로부터 배운 학문과 성리학적 소양, 그리고 우탁으로부터 배운 과단성과 충의를 바탕으로 매사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일했다.
뜻이 곧은 선비는 애써 복을 구하지 않아도 하늘은 그 구하지 않는 자리로 나아가서 그 마음을 열어 준다.
음흉한 사람은 불행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하늘은 그 애쓰는 속으로 찾아가 넋을 빼앗는다.
보라, 하늘의 힘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인간의 지혜와 잔재주가 무슨 소용 있으랴.
‘뜻이 곧은 선비는 하늘이 길을 열어준다’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이 있다. 이제현은 대지대업(大志大業)을 이루기 위해 ‘뜻이 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로 관직 수행에 벼슬 운이 따라 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평생의 지존(至尊)을 만나다

고대의 축제는 일종의 공동 의례였다.
부여의 정월 영고(迎鼓), 고구려의 10월 동맹(東盟), 동예의 10월 무천(舞天)등 축제는 모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 사람들이 모여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춤추고 노래 부르며 음주가무를 하였다.
고려조에서는 일종의 추수감사제 성격의 공동체 신앙으로 팔관회(八關會)가 개최되었다. 팔관회는 천령(天靈), 오악(五岳),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 등 토속신에게 제를 올리는 행사를 말한다.
태조 왕건은 흩어진 민심과 지방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지배계층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팔관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고려사》에 팔관회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대회일(大會日) 전날인 소회일(小會日)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통례였고, 모든 관원이 궁중에서 도포를 입고 홀(笏, 신하가 임금을 뵐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드는 물건)을 들고 왕에게 예를 행하였다. 이어 군신의 헌수(獻壽,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 지방관의 축하 선물 봉정 및 가무백회가 행해졌다.
대회일에도 역시 축하와 헌수를 받으며, 외국 사신의 조하(朝賀, 조정에 나아가 왕께 하례함)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팔관회를 계기로 다른 나라와 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계축년(1313, 충선왕5) 11월 14일 소회일. 충선왕은 불법에 의한 호국을 염원하기 위해 법왕사에 행차하여 법회를 열었다. 법왕사는 태조 2년(919년) 국가의 융성을 불법(佛法)에 의지하고자 개경 내에 십찰(十刹)을 세울 때 수위에 둔 사찰이다.
이튿날(15일) 대회일 아침. 개경의 본궐에서 팔관회가 열렸다. 행사장은 신봉문에서 승평문에 이르는 구정(毬庭)이었다. 충선왕은 신봉루(神鳳樓) 누각 위에서 국민 화합을 위해 죄인의 대사면(大赦免)을 내렸다.
행사장인 구정의 규모는 수천 명을 수용할 정도로 매우 넓었는데,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윤등(輪燈)과 향등(香燈)으로 밤이 새도록 땅에 광명과 향기가 가득하였다. 50척이 되는 연화대 모양의 채색된 누각은 아른아른 빛났고 갖가지 유희와 노래와 춤이 그 앞에서 벌어졌다. 팔관회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개경 도성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모든 역사는 ‘만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만남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한다. 이제현과 충선왕의 만남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고려 말 격동의 역사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마른하늘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예고 없이 다가왔다. 탄생에 선택이 없듯이 인연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였던 것인가. 그 인연은 충선왕을 도와 연경에 만권당을 만들고 성리학을 공부하여 고려에 전한 백이정(白正)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팔관회장은 고려의 지존인 충선왕과 학문과 문장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는 젊은 선비 이제현, 두 사나이의 결합을 위한 만남의 장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선왕은 뚜렷한 이목구비와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몸을 갖고 있었으며, 개혁 군주답게 진한 눈썹과 까맣게 타오르는 두 눈은 상대방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어 보였다. 다소 무뚝뚝한 그의 성격 때문에 많은 신하들은 어려워했지만 이제현에게는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27세의 이제현은 내시들에 의해 본궐의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신봉루 누각 위에 있는 충선왕의 옆자리로 안내되었다. 충선왕은 때마침 누각 아래 구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악과 팔관가무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에게 부복(俯伏)하고 신하된 예를 갖추었다.
“소신, 전하의 부름을 받은 내부시부령 이제현이라 하옵니다.”
“오, 공은 첨의정승(僉議政丞, 종1품의 관직) 이진의 자제가 아닌가.”
“예, 그러하옵니다.”
“듣던 바와 같이 영명하게 생겼구먼. 공은 그동안 권부, 백이정 재상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다지?”
“예, 두 분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사옵니다.”
“공의 학문이 뛰어나다 하여 그 명망이 원나라 연경에까지 자자하던데.”
“당치 않은 말씀이라 신은 미처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충선왕은 내시들을 불러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충선왕과 이제현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축배의 잔을 들었다.
“공은 앞으로 고려 사직을 위해서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야.”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더 이상의 긴 말이 필요 없었다. 형형한 눈빛만으로 두 사나이는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었다. 가슴에 진동하는 맥박의 빨라짐만으로 서로를 가슴속에 깊이 담게 되었다. 이제현은 마음 가득 신비하게 번지는 충성심의 용틀임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충선왕의 포로가 되어갔다.
‘충선왕과의 오늘의 만남은 하늘과 부처님이 그 시기를 정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제현은 온 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지는 흥분을 느꼈다.
그는 충선왕이 내린 하사주를 흠뻑 마시고 삼경(三更)이 지나서야 팔관회 행사장을 빠져 나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술기운을 가시게 했는지 취기는 온데간데없고 정신은 더욱 청아하게 맑아왔다. 한겨울 보름달 아래서 군신이 함께 취한 순간이 아스라이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제현은 충선왕이 자신에게 한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고려 사직을 위해서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야…….’
이제현은 조정에 출사하기 전부터 하나의 대지(大志)를 품고 그걸 가꿔 왔다. 그것은 ‘병화(兵火)에 찌든 고려를 재건하고, 만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고구려의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꿈이었다.
충선왕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충선왕의 세월도, 이제현의 세월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히 흐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심저(心底)에는 끊을 수 없는 신뢰의 강이 미래를 향해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개성과 연경은 삼천 리가 넘는 먼 길이다. 그것은 충선왕과 이제현의 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드시 좁혀지고야 말 거리였다. 고려 사직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삼천 리가 삼십리 지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27세에 만권당의 문사로 뽑히다

1313년(충선왕5) 11월 하순 어느 날.
팔관회 행사가 마무리된 후 마침내 이제현이 연경 만권당(萬卷堂)의 문사로 뽑혔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이것은 이제현을 고려의 역사적 인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충선왕은 원나라 문사들에 대적할 인물로 경륜 있는 중신들보다는 뜻이 크고 문장이 고매한 이제현을 선택했다. 여기에는 충선왕과 아버지 이진, 장인 권부, 스승 백이정의 각별한 관계와 더불어 이제현이 성리학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진은 충선왕이 즉위한 후 고려의 위기를 자각하고 과감한 개혁추진의 산실로 만든 사림원(詞林院 : 왕명의 출납, 인사행정 담담)의 4학사의 하나로서 박전지(朴全之), 오한경(吳漢卿), 권부 등과 함께 충선왕을 도와 개혁에 참여했던 인연이 있었다.
사림원은 조선시대 세종 대의 집현전(集賢殿)과 비슷한 연구 기관이다. 충선왕은 이곳에 지방 향리가문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젊은 학사들을 배치하였다. 충선왕이 사림원에 행차할 때는 좌우 수행원을 모두 물리쳤으며, 매일 학사들과 정치 전반에 대해 토론하며 손수 주식(晝食, 점심밥)을 주면서, 혹 밤중까지 이르게 되면 궁 안의 등불을 집에까지 내어 주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충선왕이 이진을 극진히 총애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 전한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