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박주민, 신창현 의원. <뉴시스>
“현행법과 조화 및 사회적 파장 고려해야… 제한적 도입이 타당”

[일요서울 | 고정현 기자] 20대 국회에 계류된 법안이 1만 건을 돌파했다. 의원 입법은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입법부 우위 체제가 확립되면서 양산되고 있다. 하지만 의원 발의 법안이 원안이나 수정안의 형식으로 통과되거나 대안 법률을 통해 현실화된 비율은 19대 국회를 기준으로 34.6%에 그친다. 가결률만 따로 보면 14.4%다. 이 기간 정부 발의 법안의 73.5%가 법률에 반영됐고 가결률도 34.7%라는 점을 감안하면 의원 입법의 현실화 가능성은 정부 법안의 절반을 밑도는 셈이다. 이에 일요서울은 시급한 도입이 요구됨에도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들을 조명해 보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 그 두 번째는 최근 BMW 화제 사태로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관련 법안이다.

#발의 배경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제조사 등 가해자가 고의적·악의적·반사회적 의도로 불법행위를 한 경우 피해자에게 실제 손해액보다 더 많은 배상액을 인정하는 제도다. 최근 BMW 화재사고의 빈발로 정치권에서 제도 도입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지난해 4월 제조물책임법에 도입됐다. 하지만 정작 BMW 소유주들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적용을 받기는 어렵다. 현행법상 징벌적 손해배상은 ‘생명 또는 신체에 중대한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 한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처럼 직접적인 신체 피해가 입증돼야 하고, 단순히 차량 전소로 인한 손해나 정신적 피해만으로는 이 요건을 충족하기가 어렵다.

배상액도 문제다. 위 법률에 규정된 배상 규모는 피해액의 최대 3배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미국의 경우 최대 8배의 손해배상이 규정돼 있고 유럽의 경우 이보다 더 큰 배상을 규정한 곳도 있을 만큼 제도가 소비자 위주로 안착돼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상한은 물론 적용 범위를 생명과 신체에서 재산상 손해로까지 확대하고, 제품 하자와 결함 입증 책임도 소비자가 아닌 회사가 지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미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박주민, 김영호, 김종민, 노웅래, 문미옥, 박경미, 박남춘, 박정, 오제세, 유은혜, 윤관석, 이철희, 이해찬, 황희 의원 등이 징벌적 손해배상과 관련한 법안을 제출했지만 계류돼 있는 상태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 등 10명은 제조물의 결함을 알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도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 징벌적 배상책임을 지우고, 한도를 현행 3배에서 5배로 상향 조정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개정안은 기존의 ‘생명 또는 신체’ 외에 ‘재산’에 대한 손해가 발생한 경우도 가중 배상 요건을 인정하도록 했다.

#이해관계 단체 반응

BMW 520d 모델을 이용하다가 지난 7월 19일 차량 화재 피해를 당한 ‘BMW 피해자 모임’ 소속 이 씨는 현행 제도가 기업에 무거운 책임을 지우지 않기 때문에 BMW 측의 사후 대응이 미흡했다고 지적했다.이 씨는 “화재 처리 과정에서 실질적인 책임자가 없었고 이 문제에 대응할 전담 팀도 BMW에 없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있는 나라에 비해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안일했고, 적당히 문제를 감추다가 나중에 배상하자는 식으로 나오는 것 같아 화가 났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순장 소비자주권연대 팀장은 “이번 BMW 사태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였고 기업이 여기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게 드러났다”며 “이런데도 징벌을 하지 않는다는 건 소비자를 우롱하는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영미법에서는 이미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다 시행하고 있다”고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나아가 법조계에서는 제조물책임법을 벗어나 민법 전반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조인 A씨는 “실제 효과가 있으려면 제조물 책임법이 아닌 민법에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법이 같은 취지로 개정되면 BMW 차량 가액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피해, 불이 옮겨 붙으면서 발생한 다른 물건에 대한 손해에 대해서도 지금보다 훨씬 고액의 배상금을 물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국내 기업 측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BMW나 수입차뿐만 아니라 국내 업체를 포함한 모든 기업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업의 한 관계자는 “사실 현대기아차 등 자동차 기업뿐만 아니라 어느 기업이든 반대의 입장은 마찬가지일 것이다”라며 “제품을 일부러 하자 있게 만드는 기업은 없다. 대부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의외의 사태가 벌어진다. 징벌적 손배제의 범위와 금액이 더 늘어난다면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다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상임위 평가

민병두 정무위원장은 지난 8월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난해 통과된 제조물책임법에는 한계가 있다”며 개정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향후 개정 방향으로 ▲손해배상 입증책임 전환 ▲재산상 손실도 징벌적 손해배상 ▲고의성이나 피해 범위에 따라 손해배상의 규모를 3배 이상으로 증가 등을 제안했다.

다만 정무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개정 자체에는 찬성했지만 ‘범위’와 ‘액수’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며 각론에서는 이견을 보였다. 정무위 소속인 한 야당 의원은 “징벌적 배상을 물을 수 있다면 합리적 선에서 결정해야 한다”면서 “우리도 차량 수출을 하는데 거꾸로 이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될 것 아닌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지 무조건 엄청나게 (손해배상을) 물릴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총평

기업들이 국내 소비자들을 홀대한다는 논란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국내 소비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려 해도 수단은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범위’와 ‘금액’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현행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 어떤 식으로든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는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다. 이에 따라 정부와 정치권이 검토 중인 내용도 배상액 상한을 5~8배로 올리고, 신체상 피해 외에 재산상 피해에도 이를 적용하는 것이다.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012년 한국법제연구원이 내놓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관한 입법 평가’에 따르면 대다수 전문가들은 현행법과의 조화 및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도입의 필요성이 시급한 분야부터 제한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 지난해 법 개정 당시에도 손해배상 한도를 최대 12배까지 하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이런 점을 수용해 배상 한도를 3배로 정했다. 지금의 확대 방안은 당시 판단을 시행 반년 만에 뒤엎는 셈이 된다.


고정현 기자  jh0704@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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